콜롬비아의 악명 높은 마약갱단 두목이었던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들이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반 방송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의 시리즈물인 '마약 수사관' 나르코스 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에스코바르는 브라질 일간지 에스타도 데 상파울로와의 인터뷰에서 넷플릭스가 방영하는 나르코스에 대해 비판했다고 중남미 뉴스네트워크인 텔레수르가 8일 현지시간 보도했다. 에스코바르는 "그 시리즈물은 우선 미국의 마약단속국이 아버지한테 어떻게 돈을 뜯었는지, 아버지가 그 덕택에 미국 마이애미공항으로 마약을 보낼 수 있었던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에스코바르는 "해당 시리즈물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가미됐고, 콜롬비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아버지는 1980년대 콜롬비아 중부 메데인에서 마약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을 운영하면서 전 법무장관과 대통령선거 후보 등 조직 운영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 암살을 포함한 항공기 테러 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악명을 떨치다가 44세 때인 1995년 정부군에 사살당했다. 에스코바르는 나르코스를 제작하는 브라질 출신의 호세 파딜라 감독에게 관련 시리즈물에 컨설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파딜라가 "가족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거절했다고 전했다. 에스코바르는 "나르코스 시리즈물은 마약 범죄에 희생된 많은 사람과 콜롬비아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미국 마약단속국을 미화하는 쪽으로 조작됐다"고 비난했다. 그는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 가수였던 프랭크 시내트라는 아버지와 마약 사업을 한 가수 중 한 명이었다"며 "마약 거래 조직의 도움을 얻어 경력을 쌓은 가수는 생각보다 많다"고 설명했다. 유명한 가수들이 마약 조직과 거래를 한 증빙 서류는 남아있진 않지만 자신은 아버지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에스코바르는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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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세계가 인정한 콜롬비아의 마약왕.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장남이 지금 희생자의 유족을 방문해서 사죄하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현지 콜롬비아는 여전히 마약거래와 폭력, 살인이 횡행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의 취재에 응한 에스코바르의 장남은 아버지가 저지른 무거운 죄에 전율하면서도, '유족의 용서를 구하고 대화를 통해서 폭력의 연쇄를 내 대에서 끊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남은 현재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건축가로 성장한 후안 세바스찬 마로킨씨. 예전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따서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 그에게는 온화하고 좋은 아버지였지만, '비행기를 격추시키거나, 보고타 시내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아버지 때문에 죽은 희생자는 3-4천명은 족히 될 것이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마약거래의 중심지라고 일컬어지는 콜롬비아 서부 메디진의 호화 저택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저택 내에는 동물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하마나 얼룩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주말이 되면 인근의 주민들이 방문해서 많을 때는 하루에 2만 5천명이 방문한 때도 있다고.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마약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엄청난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5천채의 집을 지었고, 한때는 국회의원도 했었다. 7살때의 일이다. 아버지를 마약상으로 지목하고 비난하던 당시 법무장관 로드리고 라라 보냐가 살해당했다. 아버지가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콜롬비아 당국과 라이벌 조직과의 항쟁이 격화되었고 가족은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살해당했다. 이제까지 뒤를 받쳐주던 아버지의 보호를 잃자, '마치 옷이 홀랑 벗겨진 채로 거리로 나앉은 것 같은'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합해 3명은 계속해서 도망을 쳐야 했다. 국외로 망명을 하려고 했지만 거의 100개 국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이름을 바꾸고 정체를 감춘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건축가가 되었다. '아버지가 부순 것을 다시 고쳐놓고 싶었다'고 후안은 직업을 선택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2004년, 아버지 에스코바르의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의 시점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아르헨티아 영화감독의 요청을 받았다. 반년간 고민한 끝에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죽인 보냐 법무장관의 아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썼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콜롬비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찾아왔다. 부모가 앙숙이었던 두 사람의 면회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죄]로 만들어져서 전세계에서 상영되었고 유럽과 남미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후안이 만났던 유족은 40여명 정도이며 앞으로도 속죄의 여행은 계속될 예정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 그리고, '대학에 가고 싶어했던 아버지는 빈곤때문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약의 길로 들어섰다. 가난해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콜롬비아에도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 : 1970년대에 '메디진 카르텔'이라고 불리는 마약거래조직을 결성, 전성기에는 세계 코카인 시장의 8할을 점유했다고한다. 포브스지에서 세계 부호 10위 이내에 들어간다고 기록한 적도 있다. 콜롬비아 대통령 후보를 죽이거나 항공기와 빌딩을 폭파하기도 했다. 1993년 메디진의 은신처에 있던 중 치안부대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次の이 포스트는 메데진에서 한 파블로 에스코바르에 관한 투어를 기반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제가 투어를 했던 여행사의 여자 가이드 같은 경우 영어를 굉장히 잘했는데 사실 그 말이 너무 빨라서 제가 6-7할정도나 알아들을 정도였지요. 따따따따따!!!! 이 정도면 남미에서 거의 영어 가이드 계의 아웃사이더 래퍼 수준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따따따따따!!!! 만일 영어에 그다지 자신이 없으신 분이라면 파블로 에스코바르 투어를 하실 경우 이 포스트를 먼저 읽고 가시는게 나중에 투어를 진행하는 데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되어 이 포스트를 작성하게 됩니다. 그것도 무려 오늘 한 투어를 오늘 저녁에 작성하는 겁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 투어 들어갑니다. 제가 투어를 하게 된 파이사 로드 가이드 에이전시 입니다. 파이사는 메데진이 속한 어떤 행정구역 내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네요. 제가 메데진에서 묵었던 블랙쉽 호스텔에서는 오전 9시와 오전 10시반,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파블로 에스코바르 가이드 투어를 진행합니다. 9시 투어는 12시에 종료하는 투어로 65000페소였고 10시반 투어는 오후 2시에 종료하는 투어로 40000페소였습니다. 깔리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오느라 굽이굽이 있는 도로길을 따라가는 버스 안에서 하도 헤드뱅잉을 한터라 많이 피곤하기도 했고 아침에 도착해서 식사도 하고 샤워도 하느라 시간도 필요도 했고 첫번째 가이드 투어는 너무 비싼 감도 있어서 결국 저는 저렴한 두번째 가이드 투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는 도시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흔적을 찾아다닙니다. 가이드가 이동을 하는 동안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특별 장소에 도달해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줍니다. 참고로 이 PAISA ROAD는 론리플래닛에 유일하게 소개된 가이드 에이전시입니다. 콜롬비아의 전설적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그의 아이디 카드라는데 그의 이름이 파블로 에밀리오로 나오는군요. 사실상 그의 Full Name은 Pablo Emilio Escobar Gaviria였습니다. 1949년 12월 1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파블로 에스코바르. 본래 어렸을 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의사나 우주인, 선생님, 과학자와 같은 모범적인 답을 내놓던 친구들과 달리 파블로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고 합니다. 파블로는 언제나 백만장자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10대 때부터 그는 가짜 복권을 판매하고 주류 밀수나 자동차를 훔치는 등의 범죄 경력을 쌓으며 꽤나 성공을 했는지 22세가 되어서는 그의 꿈대로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그의 꿈은 어느순간 백만장자에서 억만장자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를 억만장자로 만드는 길에는 널리 알려진 바대로 코카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26살이던 나이에 그는 15살이었던 마리아 빅토이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하여 아들과 딸, 후안 파블로와 마누엘라를 두게 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마약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그의 사업은 점차로 커졌습니다.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서 그는 그가 본거지로 활동하는 메데진에서 마약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조직인 카르텔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남미에서 마약의 유통에 있어서 8팔은 메데진 카르텔이, 2할은 칼리 카르텔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머지 2할마저도 차지하고 싶어서 그만의 민병대를 조직해 칼리 카르텔을 공격합니다. 칼리 카르텔과의 교전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내에 공급하는 마약의 80퍼센트를 독점하는 수준으로 영향력을 뻗쳐갔습니다. 쿠바나 베네수엘라의 루트를 개척하기도 해서 최대의 수확지인 미국에 마약을 공급했습니다. 그는 마약을 운반하기 위한 비행기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잠수함까지 동원해서 마약을 미국에 공급했습니다. 레이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잠수함은 언제나 미국으로 입항하는 배의 아래에 붙어서 이동을 했다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그의 마약 공급은 미국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유럽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전세계 마약 시장의 대부가 되었고 세계적인 수준에서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1989년 미국의 포브스지는 그의 재산을 250억 달러로 추정하여 세계 7위의 부자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갑부가 되었으면서도 메데진 주민들의 신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메데진의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돈을 뿌려주었고 그들을 위해 집을 사주고 학교나 병원, 교회 등을 지어주는 등 로빈후드와 같은 의적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영웅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 그리하여 그는 나중에 경찰이나 미국의 정보기관에 쫓길 때에도 언제나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들로부터의 추적을 피해서 도망다닐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에 힘입어 그는 국회의원에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는 미국의 백악관 앞에서 아들과 사진을 찍기도 했지요. 그는 수많은 뇌물을 뿌려가면서 정부의 고위 관리층을 포섭했습니다. 뇌물 아니면 총알. 만일 뇌물을 받기를 거절한다면 그 관리들마저도 암살을 해버려서 공권력을 넘어선 그의 영향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웠습니다. 전 세계의 마약왕이 된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잡기 위해 천문한적인 단위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를 도와주게 된다면 언제나 더 많은 돈을 지불해주겠다는 식의 카툰이 아무런 저항없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로부터 뇌물을 받기를 거절한 경찰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암살자들인 시카리오에 의해서 죽어나갔습니다. 시카리오는 그들이 암살할 사람을 바로 찾아서 제거하는 히트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암살이어도 죄책감을 느끼는 그들이었기에 이를 경감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기도 장소는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암살을 하기 전에 항상 찾았다는 성모 마리아. 이 암살자들이 하는 기도는 단순명확했습니다. "만일 저희들이 죽이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 총알이 곧바로 나갈 수 있게 해주시고 만일 그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 총알이 그를 피해서 휘어갈 수 있도록 성모 마리아께서 기적을 보여주세요. 저희는 단지 방아쇠를 당기겠습니다" 경찰을 죽일 때마다 암살자들은 경찰의 계급에 따라서 포상금을 얻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경찰서를 자동차 폭탄테러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득만 생각했던 몇몇의 경찰은 동료 경찰을 살해하고 파블로로부터 돈을 챙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의원의 임기를 4개월 여 남은 무렵, 아마도 법무부 장관은 그를 의원에서 해임시키고 맙니다. 그는 분노의 날을 갈았고 국회의원에서 해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부 장관은 결국 암살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 날선 비판을 했던 다른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도 암살이 되어 그 누구도 파블로 에스코바르에게 대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암살행위는 테러로까지 확대되게 됩니다. 90년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조지 부쉬 행정부는 콜롬비아의 세자르 가비리아 대통령과 합의하에 콜롬비아에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미국으로 보내기 위한 범죄인 인도협약을 마련하기 위해 콜롬비아 법무인과 판사들이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을 과정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비행기를 폭파하는 테러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나 에스코바르의 생각대로 메데진 카르텔을 없애겠다고 한 대통령 후보는 비행기에 타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그의 악명은 더욱 높아져갔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 부시 행정부는 파블로를 잡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미국은 미국 안보에 위험이 되는 인물은 정보요원들이 사살해도 좋다는 식의 안을 발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콜롬비아 정부에서도 더이상 어찌하지 못하는 거물이었던 파블로는 이로써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콜롬비아의 특수부대는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협력을 받고 1992년 그의 저택을 기습하여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체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블로는 웃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경찰에 잡힌 파블로는 콜롬비아 정부를 상대로 해서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만일 자신과 자신의 부하원들을 사면해준다면 정부가 지니고 있던 빚 3540억 달러 현재 한화로는 360조 를 갚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던 콜롬비아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돈을 뇌물로 뿌린 그는 이 체포된 상황에서 또다른 기상천외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일반적인 감옥에 투옥되지 않고 그가 직접 지은 그만의 감옥에 머무르게 됩니다. 무려 40만평의 대지에 온갖 호화 시설을 갖춘 그만의 저택에서 감금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테니스장, 수영장, 볼링장, 당구장, 나이트, 바 등이 마련되어 있는 개인의 호화 저택에서 개인 사설 경호원을 가드로 두면서 그는 개인 감옥이란 허울의 호화 저택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낮 시간동안 그는 안에서 마약과 관련된 사업 전반을 관리를 해나갔고 저녁마다 그만의 호화 감옥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미국정부는 그를 그대로 범죄를 행할 수 있도록 놔둔 콜롬비아 정부를 질타하면서 범죄라 신분으로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미국에 이송할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파블로는 이 요새와 같은 저택 감옥에 머무는 것이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음을 감지하고 1992년 7월, 부하 9명과 함께 이 저택 감옥에서 탈출을 감행합니다. 저택 주위로 400여명의 군인이 있었지만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블로 일행이 저택을 떠나는 것을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미국 행정부는 콜롬비아에 델타포스의 특수부대와 정보요원들을 동원해 파블로를 잡기위한 작전을 세웁니다. 그러나 메데진의 민간인들 집으로 들어간 파블로는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쉽사리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던 차 정보요원들은 파블로의 측근으로부터 그가 은신해 있는 곳의 정보를 입수합니다. 이에 미국의 델타포스와 콜롬비아 특수부대 연합은 파블로의 은신처를 찾아냅니다. 1993년 12월 2일. 그의 생일 파티를 마친 다음날 그는 그를 추격하던 특수부대의 작전에 사살당합니다. 그를 사살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이렇게 그의 시체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때 국가마저도 무섭지 않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파블로 에스코바르. 그의 길을 막아서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비호하던 파블로의 측근들은 차츰차츰 미국의 정보요원과 특수부대의 압박에서 죽임을 당했고 마지막에 그를 지켜주었던 것은 충직한 경호원 하나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사라진 뒤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은 어찌되었을까요? 비록 파블로와 같은 독재자와 같은 인물은 나오지 않고 이 카르텔은 여러 범죄 집단에 의해 분할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상당수는 콜롬비아 자국 내 뿐만이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는 루트를 확보해서 이를 전 세계에 조달하고 있습니다. 여러 집단이 경쟁적으로 마약 루트를 개척하고 이를 경쟁하다보니까 파블로의 죽음 이후 공급하게 되는 마약의 가격은 전반적으로 더 낮아졌고 더많은 양의 마약이 미국에 공급된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메데진의 한 공장에서는 마약이 생산, 유통되고 있습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 그 공장밖에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차밖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마약이 메데진 시내에까지 버젖이 공급되고 있는 현장까지 확인한 뒤에 투어 그룹은 마지막 행선지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무덤을 찾아 나섭니다. 이곳이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묻힌 곳. 공동 묘지가 번잡스러워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비석은 저렇게 땅에 평평하게 묻히는 형태를 해야만 한답니다. 거의 모두가 대동소이한 하얀 색깔의 눕혀진 비석들입니다. 메데진의 주민들이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관을 옮기고 묻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해 이를 돕습니다. 희대의 물이었던 파블로는 호화 별장을 개인 감옥으로 했던 만큼 이 묘지에서도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묘지는 예외적이었습니다. 이곳이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일가의 무덤입니다. 땅으로 숨어있는 하얀 비석들과 다르게 파블로와 그의 일가들 비석은 지상으로 솟아난 검은색의 비석입니다. 특별한 공간에 특별한 형태로서의 묘를 가지게 된 파블로 에스코바르. 저 멀리 메데진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누간가가 파블로의 묘에 헌화를 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묘를 방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해서 가이드 투어는 종료가 됩니다. 그러나 파블로의 죽음 이후에도 그가 잊혀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은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현찰이 가득한 비밀금고에 대한 소문때문입니다. 불법적인 형태로 돈을 벌었던 파블로는 이를 보관하기 위해 재산을 여러개의 비밀금고에 나누어 분산시켜놨다고 합니다. 실제로 정글의 밀림에서 그의 비밀금고가 발견되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비밀금고로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이 밖에 최근에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도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장악했던 메데진 카르텔이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독일전 참패 후 브라질 마피아 조직 PCC는 브라질의 주 공격수였던 네이마르를 심각한 부상에까지 이르게 한 수니가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보복을 예고했고 현상금까지 내걸었습니다. 이에 콜롬비아의 메데진 카르텔은 "만일 수니가를 건드린다면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은 물론 가족들 모두 죽이겠다" 경고했습니다. 마약을 주요 사업을 하는 카르텔이지만 아직까지도 수많은 범죄와 연루된 집단이기에 그 누구도 메데진 카르텔을 함부로 심기불편하게 만들 일은 없어보입니다. 이상 파블로 에스코바르 투어에 대한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이제 제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놓으려 합니다. 사실 에콰도르를 벗어나 콜롬비아로 들어와 깔리에 이르고 또 깔리를 지나 다시 메데진에 오르는 길에 버스에 탔던 승객들 모두 경찰의 검문을 받았습니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거나 운반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적발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이드 말로는 이 경찰들이야말로 마약 유통의 한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하네요. 가이드를 한 여자는 콜롬비아 그렇게 경찰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녀나 그녀의 친구인 운전수가 어릴적부터 보아왔던 카르텔간의 수많은 분쟁과 싸움, 그리고 이로부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죽어야만 했던 선량한 서민들을 보면서 이런 암울한 시대 상황이 우리를 키웠다면서 그들 스스로 메데진의 과거와 현재 상황에 수많은 형태의 조롱과 비아냥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가이드 투어는 좀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가이드 투어 자체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가이드가 보여준 자신들이 겪어온 메데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해석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국가나 국민성에 대해서 '정말 행복한 나라에다 멋진 국민들이죠'라는 식으로 조롱을 해댔습니다. 저는 제대로 된 비판에 관해서는 언제나 수용적인 자세로 검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도적이고 속이 뻔히 보이는 빈정거림이나 조롱에 관해서는 좀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빈정거림이나 조롱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나 방향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순간만의 자기 만족을 위해서 속을 삐뚫어지게 게워내는 듯한 성향이 강한 이유 때문입니다. 시대의 불우한 상황들이 자신들을 키워왔기 때문에 그런 시니컬한 자세를 취하는 게 당연한 모습이라고 스스로를 항변하는 가이드였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시니컬한 모습 넘어서 그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타진과 의지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그런 조롱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말은 사실상 인과의 법에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와 친구들 세대를 불우한 세대의 희생자란 결과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그들 스스로가 현재나 다음의 콜롬비아 미래를 책임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가능하다면 다른 가이드 투어 에이전시에서 하시라 권해드리고 싶고 , 혹시나 같은 에이전시에밖에 없다면, 다른 가이드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아마도 들리게 될 안티오키아 박물관에 자신의 작품 92점을 기증한 페르난도 보테로. 그가 그려낸 파블로 에스코바르입니다. 안티오키아 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이상으로 파블로 에스코바르 투어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칩니다. 참고로 가이드가 몇번에 걸쳐서 강조한 사항. 메데진에서는 그 누가 주는 사탕이나 음료, 술을 절대로 먹으면 안됩니다. 마약이 함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용자 분들이 홍보성 도배, 스팸 게시물로 불편을 겪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경우 해당 게시물 등록이 일시적으로 제한됩니다. 특정 게시물 대량으로 등록되거나 해당 게시물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구가 포함된 경우• 특정 게시물이 과도하게 반복 작성되거나 해당 게시물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구가 포함된 경우 스팸 게시물이 확대 생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문구 및 사용 제한기간을 상세하게 안내해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한 인터넷 문화를 만들기 위한 네이버의 노력이오니 회원님의 양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로 문의하시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수정하신 후 다시 등록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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